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다른 나라와의 관계 (문단 편집) == [[네덜란드]]와의 관계 == 예로부터 네덜란드와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활발한 교류를 하여 양국간의 적대심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고 최근에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까지 밝혀지면서, 네덜란드인에게도(한국이나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71년 히로히토가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 황후]]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하자 격렬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네덜란드 노병들과 전사자의 유족들이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 회부해라!!", "히로히토가 죽인 내 아버지를 살려내라!!", "인간백정은 네덜란드를 떠나라!!"라고 항의한 것이다. 이들은 [[일장기]]를 소각하는 것부터 히로히토 부부에게 욕설 세례와 날달걀, 보온병, '''돌팔매, 벽돌까지''' 투척했다. 누가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이 살벌한 항의 시위로 인해, 수행원들은 거의 죽어나갔고 나가코 황후도 피골이 상접해 귀국할 지경이었다. 히로히토가 [[1971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를 향해 규탄 시위를 벌이며 [[일장기]]를 소각하거나, 히로히토가 탄 차에 [[계란]]과 [[보온병]]을 던져대는가 하면 영국과 마찬가지로 히로히토가 기념 식수한 나무 모종까지 뽑아 버렸다. 일왕 히로히토는 암스테르담에서 아르티스 동물원, 레익스 박물관 및 일본 자본이 지원된 신축 오쿠라 호텔을 둘러 보았는데, 아르티스 동물원에서는 한 청년이 히로히토가 탄 차에 달려들려다 경찰에 제지되거나, 레익스 박물관에서는 상복을 입은 여성이 "'''히로히토,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지(Hirohito, where is my father)'''?"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으며, 오쿠라 호텔 앞에서는 일장기 소각까지 벌어졌다. 히로히토 부처가 줄리아나 여왕과 점심 식사를 했던 바른의 소에스트틱 왕궁 앞에서도 200여 명 정도의 시위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히로히틀러는[* 히로히토+히틀러.] 집에 가라(Hirohitler Go Home).'''”거나, “살인자(Murderer)”, 또는 “19,000.”[* 옛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사망한 네덜란드인들의 숫자이다.]이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당시 대표적인 좌파, 우파 언론지인 Het Vrije Volk와 De Telegraf는 모두 히로히토에게 '강렬한 악과 비인간적인 불행'의 상징이라고 부르며 "대규모 야만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기여 혐의를 받고 있는 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는 네덜란드의 언론인으로 수마트라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일본 정부측이 연 기자회견에서 "'''그는 미안하다고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Can't he just say that he's sorry)'''?"라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관리들은 쇼와 덴노가 네덜란드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방문이지 국빈 자격으로 온 것은 아니며, 여왕의 중찬 초대는 통상적인 외교적 예의라고 해명해야 했다. [[https://www.nytimes.com/1971/10/10/archives/hirohito-is-booed-and-jeered-in-amsterdam.html|#]] [[198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일본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네덜란드는 '''쇄국 시대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했던 구미 국가로 일본하고의 인연이 구미 국가 가운데 가장 길고도 깊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는 '''네덜란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산됐다. 당시 쇼와 덴노가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였는데, 베아트릭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하고자 했을 때 네덜란드 여론은 과장 안 보태고 "'''가기만 해 봐라.'''"였다. 결국 쇼와 덴노가 죽고[* 이때 네덜란드는 일왕 히로히토의 죽음에 조문 사절조차 보내지 않았다.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050106/8146992/1|#]] [[뉴질랜드]]나 [[호주]]도 마찬가지로 일왕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뜻을 보였으며, 심지어 밥 티자드 당시 뉴질랜드 국방장관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당시 일본 총리가 조의(弔意) 담화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며 “'''[[개소리|전화(戰禍)에 시달리는 국민의 모습을 보다 못해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렸다]]'''”고 찬양한 것에 분개해 "'''히로히토는 종전 후에 총살이나 공개처형을 당했어야 했다!'''"고 다소 과격한 발언을 했을 정도. 데이빗 랑게 총리가 티자드 국방장관의 발언을 부인했지만, 일본인들이나 유족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890112000049|#]][[https://www.mk.co.kr/news/economy/855174|#]] ] 아키히토가 새로운 덴노로 즉위하고 난 [[1991년]]에야 베아트릭스 여왕은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때 베아트릭스 여왕은 신임 일본 국왕으로 즉위한 아키히토가 주최한 만찬에서 "'''그 국치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희생된 자국 군민(軍民)의 숫자까지 들어가며 "과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고통스런 체험을 진지한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울분과 원한으로 가득한 마음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음 세대들은 그런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장래를 보아야 한다"고 발언해, 네덜란드가 과거 일본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전쟁 범죄의 피해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사실 네덜란드도 한국과 상황이 묘하게 닮은 게 네덜란드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고, 일본도 이에 따라 1천만 달러를 '위로금' 명목으로 네덜란드에 지급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전쟁 피해 당사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않고, 7천 8백 명의 전쟁 피해자들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한 사람당 2만 달러씩의 배상금을 일본에게 물리도록 유엔에 제소하는가 하면, 베아트릭스 여왕의 방일에 맞춰 해당 단체의 대표가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110260047849338|#]] ] 자신의 방문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천명했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081003/8638705/9|#]]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도 [[2014년]] 일본을 국빈 방문하여 아키히토 일왕이 주최한 만찬 자리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 국민이나 병사가 체험한 것을 잊을 수는 없다'''"며 "전쟁의 상흔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희생자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https://www.ytn.co.kr/_ln/0104_201410292355276776|#]] 국왕 모자(母子)가 대를 이어가면서 일본에 대해 네덜란드가 겪은 전쟁 피해를 잊어서는 안 되고 그들도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